oshong 기자
【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전쟁을 배울 새가 어딨어? 그냥 끌려가서 거기(전쟁터)서 군인들 하는 거 보고 배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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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모습.(자료 사진) |
6·25 전쟁이 터지자 학생신분으로 참전했다는 이한모(80·오산시 청학동) 노인은 말했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오산시지회를 찾아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 날이었다.
여름이었고 유공자회는 며칠 안 남은 6·26 발발일 기념식 준비로 조금은 분주한 모습이었다.
전쟁 상황을 전해 준 두 노인 중 이한모 노인의 이야기를 먼저 적는다.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총알이 날아와 이가 다 나가고 사격 시 가늠쇠 위로 머리를 내밀면 정수리에 총을 맞아 죽는 경우도 있었다.
밥은 북진할 때만 먹을 수 있었다.
남으로 후진 시에는 지게에 주먹밥을 넣어 운반해주는 주민들도 피난을 갔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며칠씩 굶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쩔 수 없이 민가의 주인 잃은 가축을 잡아 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아끼는 전우의 죽음을 수도 없이 봐야만 했고, 전쟁 후 갈 곳 잃어 헤매기도 했다.‘
이한모 노인은 전쟁의 참혹함을 일일이 나열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간헐적으로 꺼내 놓았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2년이 흘렀지만 노인의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간간이 토해내고 있었다.
이 노인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이다.
백령도와 멀지 않은 이 노인의 고향은 1945년 광복 이후 38선(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눠 점령한 군사분계선) 이남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학생들에게 총 쏘기와 붕대 감기 등 군사훈련을 시켰다.
‘학도 호국단’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학교에서 받은 훈련으로 전쟁에 끌려갔을 때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전쟁을 배울 수 있었다고 이 노인은 털어놨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안타까운 일인지 씁쓸한 대목이었다.
이 노인이 배치된 곳은 전방이었다.
당시 그곳 주민들은 피난을 가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8군 사령대 소속으로 백령도에서 전쟁을 치렀다.
참혹하고도 비참했었을 전쟁의 기억을 이 노인은 상세히 나열해주지 않았다.
차마 꺼내 묻기도 죄스러웠다.
점심 식사 길 식당으로 향하는 참전용사들의 뒷모습은 쓸쓸하고 허탈해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을까.
바닥에 떨어져 터진 버찌 열매들을 무심히 밟으며 걷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던졌다.
“이런 거 하지 말고 우리 노인네들 복지나 제대로 해줘. 우리가 뭘 바라고 전쟁에 나갔나? 우린 그런 거 없었어. 그냥 국민들 위해, 나라 위해 간 거야. 근데 그런 우리에게 남은 건 한 달에 12만원 지원금이 전부여, 알어?”
참전 유공자회는 모두 하얀 바탕에 무궁화 무늬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명예나 부, 번쩍이는 훈장 따위를 바라지 않고 전쟁터에서 나라와 국민을 지킨 그들은 하얀 면모자를 쓰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십여 명의 유공자는 덤덤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 잊었을 편린들을 기자가 감히 꺼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구태여 돌이켜 묻기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인터뷰 말미에 한 노인(르포 2편 주인공)은 말했다.
“다시 전쟁이 나면 그것(6·25전쟁)보다 더 할 거여. 모르긴 몰라도 그건 확실혀.”
젊은 세대에게 잊혀가는 전쟁, 유공자들 가슴 깊속한 곳에는 우리 세대와 나라를 향한 우려와 걱정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참전 유공자 님들을 존경하며 국가를 위해 우리는 애국심으로 뭉쳐야 합니다,국가유공자회원 여러분을 진심으로 존경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