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hong 기자
【오산인터넷뉴스】「역사의 산증인에게 듣는 오산 이야기」
이종철 오산시문화해설사 인터뷰-읍장출신 한세택 어르신.
‘이-이야기가
종-종일토록
철-철철 넘치는 남자, 이종철입니다.’
라고 첫 인사를 했던 오산시 문화해설사 이종철 씨가 이번엔 오산의 산 역사를 들고 독자를 찾아왔다.
일제강점기 오산 행정 업무를 봤으며 읍장을 역임했던 한세택 옹(92)을 만나 오산 변천사를 들었다.
이종철 해설사가 소개하는, 시간이라는 베일에 쌓인 오산의 역사 이야기를 전한다.
▲ 일제강점기인 1921년 오산에서 태어나 오산토박이로 살아온 한세택 옹.
■ 오산 산증인, 한세택 옹
한세택 옹은 일제강점기부터 면서기로 시작해 한국동란 시 화성시 향남면 요리로 일시적 피난을 다녀왔다.
그후 보건소와 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수행하며 한국전쟁 중 적 치하에서 공출업무와 난민의 행정을 겪었다.
민족의 수난을 감내하시며 오산의 발전과 새옹지마를 온 몸으로 엮어내신 오산의 산증인이다.
▲ 일제강점기부터 공직에 근무하며 한국전쟁을 겪는 등 오산 역사의 산증인 한세택 옹.
현재도 92세의 춘추에 손수 식사를 해결할 만큼 정정하시다.
필자는 한세택 옹과 이웃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인연은 이어져 필자가 오산읍 서기로 공직에 근무할 당시 읍장이 한세택 옹이었다.
오산 역사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자칫 역사로 묻힐 뻔한 귀중한 사료가 기록될 수 있었다.
인터뷰는 10월10일 이뤄졌으며 한세택 옹은 1921년생으로 만 92세, 오산토박이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면서기를 역임했으며 전쟁 중 오산면장, 읍장을 지냈다.
1) 여계산 전설
옛날 ‘여계’라는 미모의 기생이 살고 있었다.
고을의 관리가 민생은 제쳐두고 여계의 미모를 탐하려 하자 기생 여계는 여계산 중턱에 있는 연못가로 유인해 동반 자살했다.
이후부터 이산을 여계산이라 부르게 됐다.
2) 오산의 유래
오산은 조선시대까지 바닷물이 유입됐다.
현재 명칭 은계를 위포라고 했고 인근 동탄면 배마루(방교리)까지 해수가 흘러와 이곳은 갯고랑이라 칭했다.
두 마을까지 배로 물자수송과 사람이 왕래했다.
당시는 운암뜰에 까마귀가 많아 새 鷔자를 써 鷔산으로 불렸으나 일제시대 때 검을 烏자를 써 烏山(오산)으로 개칭됐다.
일제치하 전 오산(당시 수원부 청호면)은 농가가 산재한 농촌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의 경부선 철로 개설에 따라 오산에 철로가 부설되고 오산역이 생기면서 일본인이 상당수 거주하는 준도시로 바뀌었다.
인구가 증가되고 목재다리였던 오산교가 일제에 의해 시멘트교량으로 바뀌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는 전날 은계리 앞의 오산천에서 찱흙(갯벌진흙)을 물 속에서 채집했다.
공작 시간에 사용할 정도로 찰흙이 널려있었다.
야간에는 오산천에서 횃불을 켜들고 참게와 장어를 무수히 잡기도 했다.
광복절기념 면민 체육대회를 현재의 공성운동장(당시는 맨땅)에서 경기를 했었다.
경기 후 모든 선수가 유니폼을 입은 채로 오산천에 뛰어들어 땀을 닦고 수영를 했다.
야간에는 남녀노소 할것 없이 오산천에서 목욕을 하는 등 불야성을 이뤘다.
3) 당말(역촌의 유래)
현재 청호리 지역 당말은 조선시대 안성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역촌으로 불렸다.
파발마와 관리의 숙소를 운영하던 객사마을로 말을 관리·사육하던 피 씨 가문이 거주했었다.
이들은 최하위 계급으로 관아의 허드렛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 선바위 야사
당말 끝자락 산에 선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3개가 서있는 형상으로 인근 주민은 당말이라는 이름보다 선바위로 통했다.
피재룡이라는 사람이 인천을 왕래하며 소금장사를 했다.
소금배 3척분을 갚지 않고 떼어먹자 인천의 소금업자가 찾아와 선바위동네가 어디냐고 물을 정도로 유명했다.
4) 부산동(가마뫼) 야사
일제시대 때 개량굴이라 통했던 마을이다.
생업이 어려웠던 주민들이 떡을 만들어 인근 오산장, 수원장, 안성장을 떠돌며 떡을 팔아 생업에 종사했다.
5) 수용소마을
현재 구 궐동 북단 (화진정일대) 마을로 한국전란 시 백마고지 전투가 끝나 아군 수중에 있을 때 미군이 주민을 소개하여 오산 구궐동 수용소마을에 25채의 집을 지어 거주하게 했다.
미군의 구호물자 시멘트, 목재 등을 지원 받아 가능했다.
이 과정은 당시 오산면장 윤학영 씨와 증인 한세택 씨의 활동으로 이뤄졌으며 소개 거주한 강원도의 주민들은 수수대를 이용한 빗자루를 엮어 팔아가는 생업을 주로 했다.
이 때문에 신작로 마을 입구에는 산더미같은 빗자루가 수원장으로 가는 버스를 가득 메웠었다.
6) 오산비행장 야사
한국동란 후 현 오산공설운동장 천변에는 체신부에서 관장하는 비행연락 통신대가 있었다.
초기에는 김창순 씨 앞마당에 위치했다가 현재 투마트 자리로 이전했다.
전쟁 후 미 군은 이곳에 배마루부터 운암뜰을 관통하는 활주로 건설과 죽미령열차 터널부근에서 연결하는 철로부설까지 계획하고 오산비행장으로 운영했다.
이후 지역이 적정치 않아 현재의 송탄지역(해장이)으로 이전했다.
기반 공사에 필요한 모래는 오산천에서 채취하고 석재는 현재 필봉산 중간에 있는 석재장에서 채취했다.
이런 사유로 송탄비행장이 건설돼 최초에 명명된 ‘오산비행장’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 이종철 오산시문화해설사 오지연구소장.
■ 이종철 해설사 '오지막' 개설
이종철 오산시 문화해설사(오지연구소장)가 금암동 고인돌공원(고인돌 9호 옆) 인근에 '오지막'을 개설했다.
▲ 오산시 금암동 고인돌 공원 인근(고인돌 9호 옆) 이종철 해설사의 '오지막'.
오지막 옆으로는 그가 오지 탐험을 할 때 사용한 컨테이너 막사, 무와 배추를 심은 텃밭, 간이 화장실 등이 위치한다.
▲ 오지막 옆 널린 고추가 햇살을 받고 있다.
그는 오지막 옆 비탈에 꽃을 심어 봄이면 만개한 꽃이 둘러싸인 오지막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 오지막 현판.
아울러 삼남길 안내 책자 제공도 무료로 하고 있다.
▲ 오지막은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쉼터와 안내소의 기능을 할 것이다.
이종철 해설사는 "이 곳을 지나는 누구라도 출입이 가능하며 시민의 편안한 쉼터로 자리잡고 싶다"고 말했다.
▲ 오지막 옆 삼남길. 오지막은 경기도 삼남길 안내책자를 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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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 제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