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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 거사일 오산장날 3월 29일 - 오산의 독립운동가 공칠보 선생을 아십니까?
  • 기사등록 2014-08-15 09: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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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홍충선 기자 = 공칠보 선생은 1919년 경기도 화성군 오산면(현 오산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오산(烏山)사람으로 1884년(고종 21)에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에 벌어진 독립만세운동 이후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화성군 오산면(현 오산시)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이성구(李成九),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이규선(李圭璇)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 오산역 광장 3.1운동 독립항쟁의사 추모비(8인) 

 

이들은 거사일을 오산장날인 3월 29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거사일에 이르러 공칠보(孔七甫)는 오산 장에 모인 8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에 안낙순(安樂淳)과 유진홍(兪鎭弘)이 일경에 피체되자, 공칠보(孔七甫)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공칠보(孔七甫)는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면장 류진열(劉鎭烈)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를 점령하고 우체국의 전화통을 파괴하여 수원(水原)으로부터 오는 일본군의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근의 일본인 주택 및 상점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주도하였다.

 

▲ 오산역 광장 3.1운동 독립항쟁의사 추모비(8인)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이후에도 잦은 일본경찰 및 일본인 폭행 등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며, 계속되는 일본경찰 폭행 등으로 쫓기던 중 수배되어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일제에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후유증을 앓다 1939년 10월 27일 순국(殉國)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15일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본    관 : 곡부(曲阜)

본    명 : 공석윤(孔錫允)

생존기간 : 1884.05.27.~1939.10.27.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 생 지 : 경기 수원군 성호면 [현 오산(烏山)]

주요수상 : 대통령 표창(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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