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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김지헌 기자

 

손무덤

 

-박노해-

▲ 1984년 발간 된 <노동의 새벽> 시집. '손무덤'이 수록되어 있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 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 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 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를 수 있는-

선진 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 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 박노해.
 

* 시인 박노해

 

박노해(본명 박기평)19571120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서울에 선린상고 졸업 후, 산업현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1984노동의 새벽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고 노동문학, 민중문학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의 이름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하여라는 뜻의 필명이다.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 전 경기도지사 김문수,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과 함께 투쟁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군사정권 당시 징역을 선고받고 김대중 정부에서 사면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간 난민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시를 엮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발간했고 사진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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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2-13 09: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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